“그 친구 부모님은 뭐 하셔?”
중학생 때인가, 이 질문을 처음 들었다. 난 단박에 답할 수 있었다. 모른다고.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. 그때 나는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그 부모님은 왜 궁금한지 알 수가 없었다.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다 그럴 때였다. “너네 며칠이나 됐어?” “누가 먼저 고백했어?”라는 초미의 관심사를 그 어떤 정보가 이길 턱이 없었다. 그 뒤로도 난 한참 어른들이 연애 상대의 부모님을 왜 묻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. 우리가 좋으면 그만 아닌가!
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는 채 20살이 됐다. 그저 오늘 우리가 연애를 하면 그만이지, 이 친구가 전공은 뭔지, 어디에 사는지(심지어 고향은 어딘지), 부모님은 뭐 하시는지, 가족 관계는 어떤지, 이런 걸 왜 알아야 하는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. 학벌, 벌이, 집값처럼 연애도 마치 스펙처럼 보여지고 평가받는 게 싫었다. 세상의 어두운 면에서부터 안전한 곳이 연애라면, 연애만큼은 뭘 재고 따지지 않아야 되는 게 아닌가?
성인은 괜히 되지 않았다. 전국에서 대학을 가기 위해 젊은 청춘이 서울로 몰렸다. 나도 그 한복판에 있었다. 당시 남자친구가 있어서 미팅, 소개팅, 클럽, 그 무엇도 가지 못했다. 한편으로는 못 갔다. 그곳에 간 친구들은 너무 좋았거나 너무 별로였다며 난리였다. 되레 그게 무서웠다. 부정 감정이 긍정 감정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에 새겨졌기 때문이다. 상대가 대뜸 너네 집 아파트는 얼마냐, 차는 뭐 타냐, 묻더니 네가 이쁘니까 일단 우리 만나보자는 이야기를 했다더라. 세상에, 내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거지?
폭풍같던 20대 초반이 지나고 직장인이 되니 세상이 달라보이기 시작했다. 속물 같던 질문들과 관심이 점차 내 안에 녹아들었다.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,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. “그 친구 직장은 어디야?”, “어디 살아?”, “둘이 데이트는 어디서 해? 차는?” 이런, 불과 10년 전 나였다면 까무러칠 질문들이다.
사회의 모진 매를 맞으며 생긴 건 맷집만이 아니었다. 작은 선택조차 내 것이 될 만한지, 심지어 내 것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, 이런 걸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 내 손에 쥐고 있어도 금세 사라질 일장춘몽에 불과함을 알아버렸다. ‘아직 연애를 고민하는 게 어디야.’라며 자조할 수 있는 것조차 다행이면서도 서글픈 요즘이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