언어가 바뀐다는 건,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을 가장 정확히 드러낸다.
그 시작은 영어교육과였다. 그때 언어는 상냥했다. 이유는 단순하다. 상대가 모르는 정보와 지식을 알도록 하는 데에는 내가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. I stop to sleep, I stop sleeping 에서 언제는 to를 쓰고, 언제는 ing를 쓰는지 완전 모르는 학생을 생각해보자. 그 친구에게 “아니, 이걸 모르는데, 수능은 어떻게 풀래?” 이 한 마디가 나가는 순간이 그 친구 인생에서 영어가 삭제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. 그 친구가 알고 있거나 친숙한 지점부터 서서히 천천히 지식을 깊게 넓게 만들어야 한다. 그래서 설령 여러 번 설명했어도 “수능을 어떻게 풀래?”를 목구멍으로 삼킨다. 대신 뱉는다. “자, 할 수 있어, 이걸 다 알면 선생님이 왜 있겠어!”
타인을 향한 다정한 언어를 쓰려면 그만큼 타인을 향한 다정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. 학부 5년간 내 언어의 뾰족함은 날로 둥그스름해졌다. 학생, 부모님, 동료와 선배 선생님들에게 살가워지려는 노력의 결실이었다. 그런데 그토록 깎아온 내 언어가 별로였다. 왠지 모르게 어떤 상황에서도 ‘나’는 후순위였다. 내 속상함, 답답함, 기쁨, 이런 것을 전하는 언어가 아니었다. 다시 말해, 5년 동안 점차 동그래진 언어 속에 꽁꽁 숨긴 나를 이제는 꺼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.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, 언어를 바꾸기로 결심했다.
두 번째는 인사팀이었다. 학교에서 회사로, 학생에서 직장인으로의 변화가 언어 바꾸기 결심을 돕는 데 한몫 했다. 그때 언어는 훨씬 차가워졌다. 상대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이야기도 할 수 있으려면 이 상황을 나도 상대도 납득할 수 있어야 했다. 그러려면 생각을 이성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고, 그 결과도 역시 이성적이었다. “A사가 2단계까지 잘 진행해주셨으나, 3단계에서 오류가 발생했어요. 이 부분은 저희도 백업이 불가합니다.”라고 칼같이 선을 그을 수 있는 점이 좋았다. “할 수 있어, 내가 도와줄게!”를 입에 달고 있지 않아서 오히려 심리적, 신체적으로 훨씬 덜 힘들었다. 그 덕에 이 일이, 이 환경이, 이 사고방식이, 이 언어가 내게 더 지속가능함을 알았다.
세 번째, 지금은 대학원생이다. 다시 회사에서 학교로, 직장인에서 학생이 되었다. 그래서 내 언어는 다시 상냥한가? 전혀 그렇지 않다. 회사에서보다 더 이성적인 나날이 이어진 지금, 내 생각은 그 어느 때보다 이성에 쏠려있다. 그만큼 언어도 머릿속에서 벼리고 벼려진 끝에야 비로소 입 밖으로 나온다. 앞으로 내 언어, 자꾸 차가워지기만 해서 어쩌나!